뉴욕시에 어둠이 내렸다. 2006년의 최후의 날을 최고의 날로 만들기 위해 세계 곳곳에서 몰려든 인파행렬이 미드타운맨해튼부터 센트럴 파크까지 길게 이어졌다. 몇 시간만 더 있으면 타임즈 스퀘어에서 2007년의 시작을 알리는 애플볼이 내려올 것이었다. 빌딩 옥상에 설치된 180개의 전구는 이미 며칠전부터 그 곳에서 깜박이고 있었다.
밤 10시 24분. CSI뉴욕본사는 한창 분주했다. 특히나 이런 연말에는 더욱 사건사고가 많게 마련이었다. 대니 메서도 분주한 이들 중 하나였다. 15번가 뒷골목에서 일어난 쌍둥이 살인사건이 며칠간 그를 미치게 하고 있었다. 때아닌 소나기로 현장보존이 안 되어서 증거가 턱없이 부족했을 뿐 아니라 시체도 온전한 상태가 아니어서 신원을 알아내는 것조차 애를 먹었다.
"도대체가 진전이 없네." 한참을 티셔츠에 묻은 핏자국만 쳐다보던 그의 입에서 다시 투정이 흘러나왔다. 아무도 없는 작업실에서 혼자 일하는게 평소 같았으면 무료하기라도 했겠건만, 그의 말대로 진전없는 수사덕택에 누군가 작업실에 함께 있었다면 싸움이라도 벌였을 정도로 대니 메서는 지금 짜증이 머리끝까지 뻗었다. 그나마 다행인것은 수사하면서 이렇게 증거가 부족한 사건은 일년에 몇 번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책상위로 한껏 구부렸던 허리를 펴고 창문 너머로 밖을 내다봤다. 이미 바깥은 광란의 밤이었다.
"연구실에서 맞는 새해가 벌써 다섯번째야." 그가 푸념아닌 푸념을 늘어놓고 있을 때, 등 뒤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섯번째는 내년을 위해서 아껴두라고. 올해는 연구실 밖에서 보낼 수 있을 것 같으니까 말야. 범행도구를 찾았어." 뉴욕 경시청 소속의 던 플랙 형사였다. 몇 시간만에 들어보는 다른 사람의 목소리도 반가웠지만 그는 더 반가운 물건을 넣은 지퍼백을 들고 문에 기대서 있었다. "와우- 범행도구를 찾았다구? 할렐루야! 이제야 좀 진전이 있겠네." 대니는 얼른 플랙에게 다가가서 증거물봉투를 낚아채며 말했다. "잠깐만 기다려, 혈액샘플 채취해 줄 테니까 DNA랩에 좀 전해줘." "사실, 아까 오는길에 호크스 박사님을 만났어. 그가 이미 혈액샘플은 들고갔지. 조만간 결과 나올거야. 제일먼저 해 달라고 했거든." 플랙이 오른쪽 눈을 찡긋했다. 입을 동그랗게 벌려 오-하는 감탄사를 뱉어낸 대니가 본격적으로 증거물 분석에 들어갔다.
"자, 어디 그럼 한번볼까." 새로운 라텍스 장갑을 꺼내어 끼고 비장한 표정으로 대사를 읊은 대니 메서가 지퍼백을 열고는 조심스럽게 맥가이버칼을 꺼냈다. 빗물이 닿지않는 곳에 버려졌는지 칼날에 피가 잔뜩 묻어서 그대로 굳어 있었다. 운이 좋다면 한시간 내로 지문을 찾아내고, DNA랩에 맡긴 혈액과 쌍둥이의 DNA가 일치하는 걸 확인해서 범인을 알아낸다음 적어도 자정 즈음엔 에이든이 초대한 파티에 도착할 수도 있을 것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를 말아올린 대니 메서를 보며 플랙은 문에 그대로 기대서 있었다.
한 이십분쯤을 맥가이버칼과 씨름하던 대니가 갑자기 고개를 돌려 문쪽을 힐끗봤다. 플랙이 아직 거기에 있는걸 확인한 대니가 별 생각 없는듯이 말을 꺼냈다. "에이든이 오늘밤에 굉장한 닭요리를 만들거라는데. 같이 안갈래, 플랙?" "아, 난 괜찮아." 역시 무심하게 대답한 플랙이 시선을 다시 창문너머로 던졌다. "왜? 나 그거 예전에 한 번 먹어봤는데 맛이 정말 장난아니라니까." "닭 알레르기야." "그런게 어딨어. 고양이털 알레르기랑 닭 알레르기가 동시에 있을 확률은 정말......찾았다." "지문?" "응, 부분지문이지만 이걸로도 충분해. 제발 AFIS에 있어라." 지문이 찍힌 스티커를 스캔하고는 대니 메서는 하던 얘기도 잊은채 뚫어져라 모니터를 쳐다봤다. [Benito Rodriguez] 화면에 깜박이는 이름과 함께 그의 사진이 나타났다. "오호, 이분이셨구만. 날 며칠간 돌게 만들었던 개자식이." "워, 워, 대니, 진정해. 오늘은 늦었으니까 내일 아침일찍 같이 가보자구, 응?" 웃으며 대니의 어깨를 툭툭 친 플랙이 문쪽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그럼 난 먼저 간다. 조심해서 들어가." "응. 내일 보자고." 손을 흔들며 나가는 플랙의 뒷모습을 보던 대니는 문득 어떤 사실을 깨달았다.
바깥은 생각보다 춥지 않았다. 밤새도록 타임즈 스퀘어에서 축제를 즐길 사람들을 위해서는 잘된 일이었다. 여러 방송국에서 취재나온 카메라들이 진을 치고 있었고 CNN에서는 몇시간 전부터 새해맞이축제를 생중계로 내보내고 있었다. 사람의 물결을 헤치고 집을 향해 힘겹게 나아가며 플랙은 오늘 차를 가져오지 않은 것을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몇 분후면 그는 아늑한 그의 보금자리에서 맥주나 한잔하며 편히 쉴 수 있을 것이었다. 올해는 유난히 힘든일이 많았다. 그에게도, CSI들에게도. 지금은 시끌벅적한 파티고 뭐고 그저 조용히 있고 싶었다.
따르르릉. 따르르릉. 플랙이 집에 들어와 문을 닫자마자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려댔다.
[여보세요.] "에이든? 나 대니. 미안한데 오늘 못갈거 같은데." [와, 나빴네요. 그래서 그냥 제끼겠다구요? 며칠전부터 얘기했잖아요.] "정말 미안해. 갑자기 일이 생겨서. 반장님이랑 스텔라 선배, 애덤한테도 미안하다고 전해줘." [...뭐, 할 수 없죠. 알았어요. 그럼 내년에 봐요. 해피 뉴이어.] "응, 해피 뉴이어." 전화를 마친 그는 시계를 보고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축제행렬을 지나오는 동안 온갖 사람들과 부딪히고 그들로부터 포옹도 당하고 키스도 당한 대니 메서가 플랙의 집 앞에 도착했을 무렵엔 온 몸이 녹초가 되어 있었다. 소화전에서 비상키를 찾아내어 문을 열고 들어가자 소파에 완전히 파묻혀있던 플랙이 깜짝놀라 일어났다. "대니!"
.....ve, Four, Three, Two, One. Happy New Year!!! 밖에서 카운트 다운에 이어 새해를 축하하는 인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대니는 씨익 웃었다. "해피 뉴이어." "...문 어떻게 열었어?" 멍한 눈을 하고 플랙이 물었다. "비상열쇠. 소화전에 있잖아." "열쇠 거기 있는건 또 어떻게 알았고." "알 건 다 아는 사인데 뭘 새삼스럽게." "으으음. 어서 들어와." "맥주 한잔?" "이야, 칼 주워다 준 답례가 이제야 오는군." 집에 도착해 부모님의 안부전화를 받은 후 냉장고를 열어보고 나서야 맥주가 없다는 걸 깨달은 플랙이 심하게 좌절해 있었음을 알았다는 듯. 손에 든 비닐봉지를 달랑달랑 해 보이는 대니는 그의 머리를 두어번 쓰다듬은 플랙이 간단한 안주를 준비하러 주방에 간 동안 맥주를 꺼내고 TV를 켰다. TV에서는 센트럴 파크에서 자정부터 시작된 '미드나잇 런'이 생중계되고 있었다.
그들은 각자 손에 맥주 한 병씩을 들고 어두운 거실에 한동안 말없이 앉아있었다. 한참을 티비만 쳐다보던 대니가 문득 입을 열었다. "참, 너한테 닭알레르기 같은게 없다는 것도 알아." "뭐?" 감고있던 눈을 뜬 플랙이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대니를 쳐다봤다. "저번에 랩에서 치킨 시켰을 때 잘만 먹더만." "아아." 그제야 알아들었다는 듯이 히죽 웃어보이는 플랙은 확실히 능청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그래서, 내일 농구한판 어때?" "안돼. 내일은 베니톤지 베토벤인지 하는 녀석 족치러 가야지." "아아, 그렇지 참." "잊지마, 던." 다시 잠시 침묵. "그럼 토요일은?" "......" "점심내기 어때?" "......" "싫어?" "....좋아." "그래야지, 흐흐." 그 말을 끝으로 플랙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소파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fin.
+ 모두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이건 뭐 언제적 글을 이제야. 복습이란다. (닥쳐요 쫌) 재미도 없고~ 의미도 없고~ 감동도 없고~ 말도 안되는 설정에... 부크럽지요